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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은 대부분 그를 반대했다. 언론 역시 거의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만하고 냉정한 지성인들도 그를 혐오했다. 이미 뒤떨어진 전통에 얽매인 사람들도 그를 멸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일반 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앤드류 잭슨은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 즉 노동자나 농민을 옹호하는 말을 즐겨 썼다. 하지만 살던 땅에서 쫓겨난 인디언이나 노예 상태의 흑인을 두고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더 넓은 지지기반을 필요로 했던 정부는 ‘잭슨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평범한 사람들도 정부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그들의 이익을 정부가 성실히 돌보고 있다고 믿어버리게 하는 신화를.” -하워드 진
미국, 발전 속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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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입과 ‘제2의 독립전쟁’이라고 일컬어진 1812~1814년의 미-영 전쟁 이후 미국의 국위는 높아지고 국가적 단합은 한층 공고해진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새로운’ 대륙에 세워진 이 새로운 나라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 주인은 누구이며, 국가권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논란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미-영 전쟁 이전까지 미국의 공업화는 걸음마 수준이었고, 공산품은 대부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경제가 종속되고 유럽의 외교적 압력에도 시달려야 했던 미국은 일시적 경제파탄까지 초래하며 수입 금지 조치를 여러 차례 취했고, 그것은 북부를 중심으로 미국 자체의 공업이 발전하는 기회로 이어졌다. 공업화는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격차를 가져오는 한편, 급속한 도시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연방정부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해묵은 논란에 다시 불을 붙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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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자본가들은 연방정부가 연방은행을 운영하여 자신들의 투자를 보장해줄 것과 도로, 운하, 철도(1829년에 처음으로 증기기관차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등을 부설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는 남부와 서부의 주에서 거센 반발을 가져왔는데,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북부 자본가들을 보호해 준다거나, ‘그들만을 위한’ 교통망을 만들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망노예들을 포함한 남부의 인력이 북부의 도시로 유출되는 상황도 불만이었다. 매디슨 행정부 시절에(1816년) 만든 관세법 역시 혐오의 대상이었다. 외국 공산품에 대해 자국 공산품을 보호하는 성격의 이 관세 때문에 남부와 서부에서는 질이 낮은 북부 공산품을 싫어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방은행이나 교통망 설치, 관세 문제 등은 연방의회나 주의회에서 항상 논란거리가 되고,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미국 정계도 이를 놓고 둘로 갈라져, 제퍼슨이 창립한 레퍼블리컨이 북부의 지지를 받는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s)과 남부 및 서부의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s)으로 나뉘어져 대립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북부와 남부, 그리고 서부 주민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국가정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서부 개척’이었다. 독립전쟁 이후 거의 쉬지 않고 서쪽으로 확장을 거듭해온 미국에게 광활한 서부는 자본가에게나 농장 경영자에게나 광산업자에게나 엄청난 기회의 땅이었으며, 미국 정계의 엘리트 치고 서부에서 땅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 땅을 효과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있던 스페인의 세력을 밀어내는 한편(전쟁으로, 돈으로, 또는 음모로), 아득한 세월 동안 그 땅을 차지해온 인디언을 몰아내는 일이야말로 새 시대의 ‘영웅적 과업’으로 여겨졌다. 그런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앤드류 잭슨이 있었다.
맨주먹으로 일어서다
잭슨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이며, 그의 부모는 미국에 온 이듬해에 그를 낳았다. 역시 앤드류 잭슨이라는 이름이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3주 전에 사고로 죽었으며, 잭슨은 홀어머니의 손으로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라고도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별로 없다)에서 자라났다.
이런 배경은 나중에 미국 제7대 대통령이 되는 그의 전임자들과는 매우 달랐다. 워싱턴에서 존 퀸시 애덤스에 이르기까지의 대통령들은 모두 부유하고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었으며, 대개의 경우 교육도 최고 수준으로 받았다. 또 6명 중 4명이 버지니아 출신이라 ‘버지니아 왕조’라는 이름까지 나왔다. 그러나 잭슨은 집안도 보잘것없고 학력도 신통치 않은(변호사 자격을 위해 대학을 잠시 다니기는 했으나 대체로 독학을 했다. 대통령이 된 그에게 하버드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주려 하자, 그의 정적들은 “철자법도 제대로 모르는 인간에게 무슨 망발이냐?”며 비판했다) 이민 2세 시골뜨기였고, 16대 링컨과 함께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서민적인 대통령(이른바 ‘통나무집에서 자라난 대통령’ 신화도 잭슨이 먼저이다)으로 남게 된다. | |
영국 장교에게 대들다 부상을 입는 소년 잭슨 <출처: en.wikipedia.org> |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열세 살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전령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자기 군화를 닦으라는 영국군 장교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가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고 왼손과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얻었다고 한다. 열네 살 때는 어머니마저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남으로써 잭슨은 고아가 되었고, 이후 안장 만드는 업소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잇다가 틈틈이 한 법률 공부로 스무 살에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배경이 신통치 않았던 그는 도시에서 부자들을 상대로 일거리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서부로 가서 거칠고 위험한 환경을 견디며 경력을 쌓았다. 한때는 인디언의 습격으로 동료들 전원이 몰살하고, 혼자만 살아남는 일도 있었다.
1788년부터 테네시의 내슈빌에 정착한 그는 스물네 살이던 1791년에 레이첼 로바즈라는 여성과 결혼하는데, 좀 문제가 있는 결혼이었다. 그녀는 당시 남편과 별거 중으로 정식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잭슨과 살고 나서 2년 뒤에야 정식으로 전남편과 이혼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잭슨의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으며, 이 사실을 두고 그를 비아냥대던 사람을 상대로 잭슨은 세 차례나 결투를 신청해 두 차례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까지 했다. 잭슨은 다혈질에 성마른 성격이었으며, 뭔가 목표를 세우면 세상 어떤 것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이후 그의 운은 점점 트이는 것 같았다. 험한 서부에서의 변호사 활동은 그에게 많은 부와(대체로 소유관계가 모호한 부동산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명망을 안겼고, 이를 바탕으로 테네시가 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 1796년에는 테네시 주 대표 하원의원, 이듬해에는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798년에는 테네시 주 대법원 판사가 되어 1804년까지 재직했다. 이 과정에서 서부에 기반을 둔 민주공화당 내에서 그의 입지도 확보되었다.
전쟁영웅의 탄생
하지만 잭슨을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어 준 것은 전쟁이었다. 1812년의 미-영 전쟁에서 서부 미국인들은 영국의 후원을 받는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았다. 테쿰세가 이끄는 레드스틱 크리크족은 백인 정착촌을 습격해 한 번에 수백 명을 살육하는 등 서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테네시 민병대를 지휘하던 잭슨은 미국 연방군과 체로키족, 촉토족 등 크리크족과 적대하던 인디언들을 총괄하는 연합군을 이끌고 크리크족에 맞섰으며, 1814년 호스슈벤드 전투에서 크리크족 전사 약 1천 명을 쓰러트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공으로 장군이 된 잭슨은 다시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의 공세를 막는 일을 맡았다. 1815년 1월의 전투에서 잭슨의 군대는 영국군을 철저히 격파했으며, 이 전투는 미-영 전쟁 전체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투가 되었다. | |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이끄는 잭슨 <출처: en.wikipedia.org> |
이로써 전쟁영웅이 된 잭슨은 1817년에도 조지아 주에서 세미놀족과 크리크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세미놀 전쟁’의 지휘를 맡아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인디언의 마을을 불사르고 밭을 망쳐 먹고 살 길을 끊었다.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의 배후에 스페인이 있음을 안 그는 스페인령이던 플로리다에 침공하여 스페인 총독을 자리에서 밀어냈다. 이 독단적 행동으로 스페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잭슨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플로리다를 스페인 땅으로 남겨두는 한 후환을 막을 수 없다는 잭슨의 설득에 따라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거꾸로 스페인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리하여 1821년에 플로리다는 스페인에게서 미국으로 할양되었고, 잭슨은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군정총독을 맡아 새로 획득한 땅을 다스렸다.
백악관으로 가는 진흙탕길
이런 그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올드 히코리(Old Hickory)”라는 별명이 생겼는데, 히코리나무처럼 단단하고 굽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올드 히코리는 1823년에 다시 상원의원이 되었고, 영웅의 명성에 기대어 바야흐로 백악관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기피하던 민주공화당의 간부들은 당시는 간부들끼리의 당대회를 일컬었던 코커스(caucus)에서 재무장관이던 윌리엄 크로퍼드를 대선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잭슨은 이를 “국민의 뜻과 평당원들의 뜻을 무시하는 당간부들의 독단”이라며 불복했고, 다수의 평당원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의 “전당대회”가 열리고 여기서 잭슨이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민주공화당은 붕괴했으며, 잭슨을 지지하던 세력은 나중에 오늘날의 민주당이 된다. 아무튼 선거는 잭슨, 크로퍼드, 그리고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가 정당이 아닌 지역 지지기반을 가지고 난타전을 벌이는 양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잭슨이 다수표를 얻었으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당시의 규정에 따라 연방 하원에서의 투표로 대통령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크로퍼드가 애덤스를 밀어줌에 따라 그가 제6대 대통령으로 뽑힌다. 잭슨은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분격했으며, 이를 계기로 “선거와 정당제도가 좀 더 대중과 가깝게 바뀌어야 한다. 엘리트들의 농간에 놀아날 여지를 없애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게 되었다.
1828년, 다시 찾아온 대선에서 잭슨은 서부의 유명 정치인 존 캘훈, 북부에서 주목받던 마틴 밴 뷰런 등과 힘을 합치고, 재선을 노리는 존 퀸시 애덤스와 다시 격돌했다. 이 선거는 미국 역사상 유례없이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이 판치는 선거가 되었다. 애덤스 진영은 잭슨의 결혼 과정에서의 문제를 끄집어냈을 뿐 아니라 그가 노예들을 학대하고 인디언들을 불필요하게 학살했으며, “미국인 병사들까지 잔인하게 죽였다”고 주장했다. 미-영 전쟁 당시 탈영병 6명을 처형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한 잭슨의 아버지는 흑인의 피가 섞였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다는 사실무근의 소문까지 흘렸으며, 학력이 변변치 못했던 잭슨을 비아냥대려고 “잭애스(Jackass)”라는 별명을 지어 퍼뜨렸다. 그런데 ‘수컷 당나귀’와 ‘멍청한 촌놈’을 모두 뜻하는 이 별명을 잭슨 스스로가 무척 마음에 들어해서, 나중에 민주당의 상징이 당나귀가 되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추잡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애덤스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했다.
‘잭슨 민주주의’
제7대 대통령이 된 잭슨은 사상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취임 기념 파티를 열고, 서부에서 축하해주러 온 카우보이들과 워싱턴의 빈민들도 마음대로 참석하도록 했다. 왁자하게 먹고 마시며 춤추는 분위기 속에 백악관 앞뜰은 온통 쓰레기와 오물로 어지럽혀졌다. 이는 “체신머리 없는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비난거리를 만들었지만, 잭슨의 시대가 미국 평민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시대가 되리라는 신호탄과 같은 이벤트였다. | |
연방은행 인가를 거부한 잭슨을 나타낸 1832년의 풍자화 <출처: en.wikipedia.org> |
잭슨은 소수의 간부가 아닌 일반 당원들이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 제도를 정식화했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참정권에 주어져 있던 재산 조건을 철폐하여 가난한 사람도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미국 특유의 간접선거 제도가 비민주적이라고 보고, 헌법을 수정하여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도록 할 것, 대통령의 임기를 한 번으로 제한할 것을 추진했으나 이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또 잭슨은 행정부가 유력한 집안 출신들의 관료로 채워져 있음을 못마땅히 여겨, ‘관직 순환제’를 도입해 오래 근무한 공무원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개방하여 재산과 학력이 없는 평민들도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이 제도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자격 미달의 공무원들이 많아졌다는 점, 개방된 공직에 잭슨의 친인척이나 친지들도 참여시킴으로써 공직사회의 물을 흐렸다는 점, 이런 제도가 결국 관직을 사고 파는 ‘엽관제도’의 길을 열었다는 점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잭슨이 북부 출신이나 명문가 출신이 많은 각료들을 불신하고, 자신과 사이가 각별한 몇몇 사람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국정을 의논하는 ‘식탁 내각’ 중심으로 정책 결정을 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하지만 이런 “비민주적, 독단적 면모”와 “정부를 진정 국민에 의한 정부로 만들고자 하는 진정성”이 공존했던 것이 ‘잭슨 민주주의’의 성격이었다.
관세법 논란과 “눈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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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에 맞서 싸운 세미놀족의 전사, 투코시마틀라 <출처:en.wikipedia.o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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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은 같은 맥락에서 소수 자본가들과 외국 투자자들을 위한 기관이라 여겨진 연방은행의 재인가를 거부했으며, 연방정부에 대한 주정부의 권한도 강화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첫 번째 임기 후반기의 “관세법 무효화 문제” 때는 연방정부의 입장에 서는 선택을 했다. 잭슨은 당시 관세율이 너무 높으며 원칙적으로 관세를 설정할 권리는 주정부에게 있다는 남부 주들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경제난을 겪고 있는 연방의 유지를 위해 관세는 당분간 불가피하다 보았다. 그리고 1832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관세법을 거부할 뿐 아니라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연방군을 찰스턴에 진주시키며 강경 대응을 했다. 이 사태는 관세율을 낮추는 선에서 타협하자는 헨리 클레이의 제안이 수용되면서 간신히 마무리되었으나, 잭슨이 원칙이 없으며 내란도 불사하는 강경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후대에 잭슨이 가장 비판을 받게 되는 그의 정책은 다름 아닌 인디언 이주정책이었다. 그는 미-영 전쟁 시절에 자신을 도와 크리크족과 싸운 체로키족에게 토지소유권을 보장하는 협정을 맺었었고, 크리크족의 고아를 입양했을 정도로 인디언과 친근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서부에 거주하는 인디언은 잠재적인 안보 위협 요소이며, 서부 개척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백인으로서, 인디언은 그가 옹호하던 ‘보통 미국인’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열등종족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인디언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했으며, 그 동안 연방정부가 인디언과 맺은 여러 협정에 구애 받지 않게끔 서부의 주정부들이 인디언 몰아내기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 |
그리고 1830년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에 따라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을 아칸소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4만 5천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눈물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갔으며, 그 과정에서 추위와 전염병 등으로 4천 명 이상이 객사했다. 세미놀 족은 이주정책을 거부하며 무기를 들었고, ‘제2차 세미놀 전쟁’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새뮤얼 워체스터처럼 인디언을 도운 일부 양심적인 미국인은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
“하나님도 못 말릴 잭슨”
잭슨은 1832년 선거에서도 여유 있게 당선되었으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여러 면에서 전보다 어두웠다. 한때 그와 협력했던 헨리 클레이나 존 캘훈 등은 이제 적으로 돌아서 있었고, 각료들도 밴 뷰런을 제외하면 무능하거나 비협조적이었다. 1835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까지 있었다. 범인은 일자리를 잃은 설움에 지쳐 발광했던 서민이었다. 사실 1830년대에 서민경제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는데, 잭슨이 연방은행 인가를 거부하고 대신 취한 금융정책의 실패도 큰 원인이었다. | |
1835년, 권총이 불발되어 암살을 모면한 잭슨 <출처:en.wikipedia.org> |
1837년에 백악관을 나온 잭슨은 내슈빌의 ‘허미티지’ 농장에서 조용히 살았다. 후임자인 밴 뷰런과 친구이자 제11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포크에게 이따금 정치적 조언을 해주었으나, 젊은 시절 입은 여러 부상과 오랜 피로의 누적으로 올드 히코리의 건강은 많이 나빠져 있었다. 더구나 재정 관리에도 실패하여, 말년에는 거액의 빚에 시달리며 근근이 살아야 했다. 1845년 6월,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인생에서 아쉬움이 남는 게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헨리 클레이를 총살하고, 존 캘훈을 목매달았어야 했는데, 그게 정말 아쉽소.”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대답은 이랬다. “그가 마음먹기에 달렸지. 그가 한번 결심하면 하나님인들 말릴 수 있겠나?”
앤드류 잭슨은 세련되고 사려 깊은 정치가는 아니었다. 지도자로서 그는 때로 경솔했으며, 독선적이고, 비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 나라가 크게 성장하고 안정의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는 독단적이고 냉혹한 한편 기득권을 억제하고 국가의 활력을 북돋우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곤 한다. 아바스 왕조의 만수르, 러시아의 표트르 1세, 조선의 태종처럼. 왕조국가가 아니며 여러 지역이 연합해서 만들어진 미국은 그에 걸맞은 지도자가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잭슨에 와서야, 다소 모자라지만 그에 엇비슷한 지도자상이 백악관에도 나타났다고 할까. 그리고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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